그녀는 1988년 5남매 중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었다. 25년 5개월 동안이나 행복을 가져다 주었던 존재가 사라진 것이다. 그녀의 애끓는 심정이 고스란히 담긴 일기가 있다. 일기의 주인공은 바로 소설가 박완서다.
그녀의 일기는 1990년 9월부터 1년간 [생활성서]에 연재되었다. 그리고 한 권의 책이 되었다. <한 말씀만 하소서>
- 저자
- 박완서
- 출판
- 세계사
- 출판일
- 2004.12.24
교만의 대가로 받은 벌?
"에미 눈에 자랑스럽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을까마는 자식들마다 건강하고 공부 잘해 한 번도 속 안 썩이고 일류 학교만 척척 들어가고 마음먹은 대로 풀릴 때, 그 에미는 기고만장할 수밖에 없다. 나 역시 그랬었다.
내가 받은 벌은 내 그런 교만의 대가였을까. 하느님이 가장 싫어하는 게 교만이라니 나는 엄중하지만 마땅한 벌을 받은 것이었다." 35쪽
"그러나 교만이 꺾인 자리는 겸손이 아니라 황폐였다." 36쪽
그저 만만한 건 신이었다.
"내가 교만의 대가로 이렇듯 비참해지고 고통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치자. 그럼 내 아들은 뭔가. 창창한 나이에 죽임을 당하는 건 가장 잔인한 최악의 벌이거늘..." 36쪽
"온종일 신을 죽였다. 죽이고 또 죽이고 일백 번 고쳐 죽여도 죽일 여지가 남아있는 신. 중오의 마지막 극치인 살의, 내 살의를 위해서라도 당신은 있어야 해." 48쪽
과음, 혼미, 통곡, 수면제, 눌은밥, 멍함, 토악질.... 얼마나 괴로웠을까.
주님과 한번 맞붙어보려고 분도수녀원에서
"주님, 당신은 과연 계신지, 계시다면 내 아들은 왜 죽어야 했는지, 내가 이렇게까지 고통을 받아야 하는 건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,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말씀만 해보라고 애걸하리라.
애걸하고 안되면 따지고 덤비고 쥐어뜯고 사생결단을 하리라. 나는 방바닥으로 무너져 내렸고 몸부림을 쳤다." 102쪽
왜 당신이라고 그런 일을 당하면 안 되는가?
"남동생이 어찌나 고약하게 구는지 집안이 편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. 왜 하필 내 동생이 저래야 되나? 비판도 되고 원망스럽기도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세상엔 속 썩이는 젊은이가 얼마든지 있다. 내 동생이라고 해서 그래서는 안되란 법이 어디 있나? 내가 뭐 관대...라고 생각을 고쳐먹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고 동생과의 관계도 호전이 되더라고 했다." 126쪽에 나오는 자신의 막내딸보다도 어린 수녀님의 이야기를 엿듣고 저자는 "구원의 실미라가 바로 거기 있을 것 같았다."라고 적고 있었다.
그렇다!
이 지점에서 나도 실마리를 발견했다. "내가 뭐 관대..." 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때, 내 상황을 부정하고 외면하고 도망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을 때 내가 도달했던 지점이 바로 여기였다.
밥이 되어라, 밥이 되어라.
"주님은 끝내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. 어쩌면 나직하고 그윽하게 뭐라고 하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늦게 난 철처럼 슬며시 왔다.
그래, 분명히 뭐라고 그러셨을 거야. 다만 내 귀가 독선과 아집으로 꽉 막혀 못 알아들었을 뿐인 것을. 하도 답답해서 몸소 밥이 되어 찾아오셨던 거야. 우선 먹고살아라 하는 응답으로. 그렇지 않고서 그 지경에서 밥냄새와 밥맛이 그렇게 감미로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." 167쪽
홀로서기는 혼자가 아니었기에
"다시 글을 쓰게 됐다는 것은 내가 내 아들이 없는 세상이지만 다시 사랑하게 되었다는 증거와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안다. 내 아들이 없는 세상도 사랑할 수가 있다니..." 173쪽
주여
저에게 다시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.
그러나 주여
너무 집착하게는 마옵소서.
<한 말씀만 하소서> 마지막 문장
하필이면 내게...
내가 뭐관대.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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